#묵상으로여는아침 #이목사큐티 #11월8일 #화요일 #창세기44장14_34
요셉은 베냐민을 종으로 삼겠다고 하며 다른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한다. 그 때,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와의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베냐민 대신 자신이 노예가 되겠다고 했다. 베냐민이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창세기 44:18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죄에서 자유하게 된 자에게는 변화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유다는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자였고, 요셉을 상인에게 팔자고 제안한 형이었다.
그런 유다는 자신이 다말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깨달은 적이 있었고, 다시는 죄를 가까이 하지 않게 되었던 체험을 했던 자였다. 그에게는 이제 죄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이를 위한 희생이었다. 사실 요셉을 팔려고 했을 때만해도 유다는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형제를 위한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아버지를 위해서, 또 동생 베냐민을 위해서 자신이 가장 먼저 나서서 희생함으로 다른 이들을 살리려고 한다.
유다의 계보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셨지만,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모든 이들의 죄를 대신 지셨고, 죄의 값을 대신 치뤄주셨다.
나를 돌아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선포하지만, 나에게 유다와 같이 다른 이들을 위한 희생을 할 준비가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전히 내게는 다른 이들을 이용해 내가 유익을 얻기를 원하는 유다의 모습이 있는가? 아니면 죄를 깨닫고, 변화되고 성화된 모습으로 다른이들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이 손해 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설교도 한다. 그런데 오늘 나의 희생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까지의 손해였음을 깨달았다. 유다의 희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은 사실 그 넘어까지 손해 보는 삶이다.
주님이 내게 희생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할 때라고 말씀하신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 성도들을 위한 삶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희생의 삶을 위해서는 용기를 내어야 한다. 오늘 유다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 애굽의 총리 앞에 나아간다. 이것은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용기여야 할까? 사실 나에게 다른 이들을 위한 희생은 내 시간을 들여 복음을 전하는 시간, 전도하는 시간을 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나의 시간을 그들을 위해 손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는 용기도 동시에 필요하다. 다른 이들에게 전도를 하려고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다.
이제 다시 용기를 내야 할 때이다. 한동안 거리전도를 하지 않았음을 생각나게 하신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의 마음이 무너질 것을 생각했었다. 나 또한 우리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영혼을 바르게 인도하지 않으면 주님의 마음 또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까?
오늘부터 다시 전도용품을 가방에 넣고 다니기로 결단한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를 하기로 결단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의 모습이고, 성화 된 자가 나아가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주님. 유다를 통해 제 안에 부족했던 모습을 다시 확인시켜 주심에 감사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뛰어 넘은 희생과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게 하시고, 그를 위한 용기를 허락하옵소서. 전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