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으로여는아침 #이목사큐티 #10월28일 #금요일 #창세기41장1_16
술맡은 관원장이 복직이 된지 만 이년이 지난 후에 바로가 연속으로 두번의 꿈을 꾸었다. 그의 마음이 번민해서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보았지만 아무도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게 되었고, 바로에게 자신의 일을 말한다. 바로는 바로 요셉을 불렀고, 꿈을 푼다고 들었다며 확인을 할 때에, 요셉은 바로에게 하나님이 편안한 대답을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창세기 41: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세상의 왕 앞에서도 나를 드러낼 용기를 가지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이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났다. 요셉은 기약없는 감옥생활을 여전히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부탁으로 인해 기대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그는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여전히 변화가 없이 머물러야만 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요셉이었지만, 반복되는 일상속에 어떤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
만약 나 같았다면 하나님에대한 불평과 불만을 토로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씀은 요셉의 그런 모습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요셉은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요셉에게 주님은 주님의 때에 요셉을 바로 앞에 세우신다.
기억하지 못했던 술 관원장은 바로의 번민을 알고 아무도 해석해 주지 못하는 꿈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요셉을 추천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 죄였음을 고백하게도 했다.
바로는 술 관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요셉을 불러 그의 앞에 세운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이 질문에 요셉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라고 대답한다.
바로는 애굽의 왕을 넘어 신이다. 신 앞에서 하나님이라는 자신의 신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요셉이 몰랐을까? 노예였고, 죄수였던 그가 말한마디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요셉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나를 돌아본다. 요셉과 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한 체험이 있다. 그런데 나는 요셉과 같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라고 담대하게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내 안에 반복되는 일상속에서도 여전히 내가 하나님으로 인해 형통함을 고백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음을 확신할 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나를구원해 주실 분이 없음을 확신할 때.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라고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요셉이 사람에게 기대했지만, 수포로 돌아갔을 때, 다시한번 자신이 의지해야 할 분이 하나님 한분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젠 바로 앞에서 좋은 말로 그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 어쩌면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임을 깨닫는다.
오늘 나에게도 이런 믿음의 선포를 하며 하루를 지내야 함을 깨닫게 하신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야 하는 그 순간에도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하심을 선포할 때, 주님의 때를 기억하고 기대하며 일어날 수 있을 줄 믿는다.
사랑의 주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의 믿음의 선포가 내 안에 있게 하소서. 아이들에게도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을 기도해 주며 알려주길 원합니다. 그들의 입술에서도 이 고백이 나오게 하소서. 그리고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의 고백으로 세상에 나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