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으로여는아침 #이목사큐티 #10월7일 #목요일 #욥기 4:1-11
엘리바스가 욥에게 여러가지를 말한다. 욥이 사람들을 어떻게 도왔고, 격려해서 그들을 일으켰었는지.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치니 스스로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서 망하게 되고, 정직한 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듯이 이야기를 한다.
욥기 4: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엘리바스는 욥의 친구로 그의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욥의 모습을 보고 일주일을 아무말도 못하고 그의 곁에 있어주었던 자였다.
그런데 옆에서 욥을 보면서, 욥의 이런 모습의 결과는 욥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을 하고 있다.
물론 엘리바스는 욥의 어려움에 위로를 위하여 이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 "네가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었던 것 처럼, 너도 어서 일어나. 너도 할 수 있어. 지금 너의 모습은 죄로 인한 결과이지만, 뭔가 희망이 생길 수 있는 것처럼 위로를 해 주려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그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위로나 격려가 될 것은 하나도 없다. 엘리바스도 하나님이 욥에게 이런 시련을 허락하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결과만 놓고 욥을 정죄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바스의 말을 통해 나를 보게 된다. 앞으로 다른 친구들의 말을 통해서도 나를 보게 될 것 같지만, 오늘 엘리바스는 나와 너무 닮은 구석이 많이 있음을 꺠달았다.
내가 누군가를 위로할 때, 엘리바스처럼 했던 때가 많이 있었음을 깨달았기때문이다.
네가 다른 이들에게 위로했던 것을 기억하고, 너도 스스로 일어나야해. 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말이다.
결국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과 위로를 전해야 하고, 나 또한 스스로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그동안 나의 위로나 격려의 말이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은, 내가 엘리바스와 같은 방법으로 상대방을 위로한다는 이유하에 스스로를 정죄하게끔 만들고, 스스로가 죄인이된 것을 보게 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제 나의 위로와 격려의 말이 달라져야 함을 깨닫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분의 은혜"를 나누어주고, "버리지 않으시고, 품으시고, 처음 우리를 창조하실 때, 허락하셨던 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과, 이런 나를 통해서도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바르게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참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가능함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하다.
사랑의 주님. 사람의 말로는 상대방에게 참된 위로와 격려를 해 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내 입술이 열릴 때 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복음'만 전해지게 하소서. 성령의 감동이 없다면 오히려 입술을 열지 말게 하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